비잔티온 항구에 상륙한 아테네 군사들은 배로 다시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항구를 방어하는 수비대의 저항이 워낙 완강했던 탓이다. 그리스인들로 구성된 방어부대는 항구를 지키는 데 성공하자 곧바로 방향을 바꾸어 성 안에 침투한 아테네인들을 소탕하는 일에 나섰다. 허나 상대는 알키비아데스였다. 알키비아데스는 주제를 모르고 덤벼든 수비대를 간단히 제압하고 3백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아테네의 비잔티온 공략 작전에서 현지 출신의 병사와 민간인의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함락된 도시의 주민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리거나, 또는 추방을 당하는 종래의 통상적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 바람직한 결말이었다.
도시의 구조물과 건축물들도 당연히 파괴의 재앙을 면했다. 아테네와 비잔틴 사이에 사람과 물건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항복협상이 타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테네 입장에서도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었다. 아테테의 주적은 라케다이몬이었다. 주적이 아닌 비잔티온을 굳이 무리하게 적으로 돌릴 이유는 없었다.
당시에 비잔티온 측 협상대표로 정전교섭을 주도한 인물은 아낙실라오스였다. 그는 나중에 전세가 바뀌어 비잔티온이 스파르타의 수중에 떨어지자 반역자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피고석에 선 아낙실라오스는 공포와 추위에 떨며 성내에서 굶주리는 여자와 아이들을 보호하려면 아테네군에게 항복하는 길만이 유일한 방책이었다고 주장하며 무고한 민간인을 구하기 위해 패전의 치욕을 불가피하게 감수하는 건 스파르타의 전통이기도 하다고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 판관들이 이러한 논리에 감동해 무죄를 선고했다고 기록하였다.
실상은 스파르타 또한 아테네처럼 “이기는 편 우리 편”인 비잔티온을 구태여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은 셈법이었으리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인 서력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동로마제국으로부터 빼앗은 오스만 투르크의 메메드 2세가 성 소피아 성당을 보존하기로 결정한 일도 어쩌면 언제나 강자의 전리품이 되어온 콘스탄티노플의 역사적 숙명을 그에게 새롭게 정복당한 백성들의 내재적 관점에서 통 크게 참작해준 덕분일지도 모른다.
알키비아데스를 추동하는 감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승리에 대한 갈망이었고, 둘째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그는 사방이 방패로 장식되고 배 안이 전리품으로 가득한 대형 삼단노선을 타고서 귀국하였다. 전리품 가운데 단연 빛나는 보물은 무려 200개가 되는 뱃머리의 조각상들로 전부 그가 나포하거나 혹은 침몰시킨 적함들의 뱃전에서 떼어낸 물건들이었다.
일설에는 알키비아데스가 선상에서 흥겨운 잔치판을 벌이며 시끌벅적하게 아테네로 입항했다고 하는데, 플루타르코스는 물론이고 크세노폰을 포함한 권위 있는 사가들은 그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귀국했다고 기록하였다. 반역자라는 전연 자랑스럽지 않은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그에게 여전히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로 돌아온 알키비아데스는 배에서 떠나지 않고 극도로 몸을 사리며 민심의 기류를 예의주시했다. 사촌인 에우리프톨레모스를 비롯해 극소수의 친지들만이 그가 머물고 있는 선박으로 직접 조용히 찾아와 돌아온 탕자와 인사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여차하면 뱃머리를 돌려 바다로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을 정도로 초조함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알키비아데스의 걱정과는 달리 아테네 시민들은 환영 일색의 분위기였다. 이때 알키비아데스를 맞이하는 아테네인들의 심정은 15년 만에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가황 나훈아를 대하는 대한민국 시청자들의 마음과 어금지금했다.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는 15년의 공백 끝에 방송에 복귀했다. 그 사이에 정권이 3번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다.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를 비운 기간은 만으로 불과 2년이었다. 그 2년 동안 아테네에는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사건들 중에서 으뜸은 시칠리아 섬으로 건너갔던 수많은 아테네 청장년들이 불귀의 객이 된 전무후무한 망국적 대참사였다. 금의환향한 알키비아데스의 늠름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테네인들의 입에선 “만약에~”라는 회한의 목소리가 이구동성으로 장탄식과 함께 흘러나왔다.
만약에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니키아스 대신 과감하고 용의주도한 알키비아데스가 계속 군대를 통솔했다면 시칠리아 원정은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시칠리아 원정이 성공했다면 스파르타는 얼마 못가 백기를 들었을 것이다. 만약에 스파르타의 무릎을 꿇렸다면 지금쯤은 불구대천의 원수인 페르시아의 대왕이 아테네로 연신 조공을 바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부질없는 상념들이 아테네 시중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그와 정비례해 알키비아데스의 명성과 주가는 더욱더 높아졌다. 테스 형 소크라테스는 나훈아에게는 역사 속의 위인일 뿐이나, 알키비아데스에는 현실에 실존하는 절친한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알키비아데스가 ‘왕의 귀환’을 화려하게 그려나가던 시기는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신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말미암아 독배를 마시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연인관계와 사제지간이라는 이중의 인연으로 끈끈하게 뒤얽힌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가 가슴 벅차게 재회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역사는 두 사람의 재회에 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필자가 가정법과 관심법을 동시에 동원해 두 사람이 뜨겁게 해후한 거나한 회식자리의 광경을 재연해본다면 테스 형은 알키비아데스에게 이와 같은 조언을 해줬을 성싶다.
“머리 검은 짐승들 거두지 마라.”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모두 사람을 하늘 높이 띄웠다가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짓을 밥 먹듯이 되풀이하는 어리석고 변덕스런 대중에게 희생당한 대표적 피해자들이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신의도 없고 인정머리도 없는 부박한 세상인심에 대해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넋두리 삼아 하소연한 내용은 나훈아가 발표한 신곡 「테스형」의 가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게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