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정치인 정세균
응당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국민의힘 당대표에 출사표를 던진 이준석 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을 겨냥해 ‘장유유서’라는, 그야말로 칙칙한 꼰대 냄새 물씬 풍기는 고리타분한 사자성어를 견제구랍시고 날렸다는 소식을 듣고서 필자는 이는 필시 정세균에게 단단히 앙심을 품은 몇몇 네티즌들이 급조한 유언비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정세균 전 총리가 나름 착하게 살아온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가 장유유서의 지엄한 법도를 새삼스럽게 강조했다는 황당한 소식은 앙심 품은 일부 누리꾼이 꾸며낸 근거 없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필자는 정치인 정세균을 좋아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정세균을 싫어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 남조선사회의 평범한 인민대중에게 정세균은 관심도, 흥미도 유발하지 못하는 멀고 낯선 정치인일 뿐이다. 좋은 감정도, 싫은 감정도 대상이 되는 누군가를 어느 정도 알아야만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오래 정치를 했으면서도, 그렇게 낮은 인지도를 갖고 있다는 견지에서 정세균은 역설적으로 작금의 한국정치의 과표인 셈이다.
모든 대중정치인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인이 대중정치인인 건 아니다. 대중에게는 존재감이 생소하고 미미해도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점은 현재의 한국정치를 옛 소련정치와 동렬에 위치지우는 핵심적 요소이다. 소련의 실질적 최고국가기관인 공산당 정치국을 구성하는 정치국원들은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정치권력자로 무탈하게 군림ㆍ행세할 수가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와 한국의 여의도 정치권은 마치 과거 소련의 모스크바 크렘린을 연상시키듯 대중과 분리되는 정당구조를 지속해왔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같은 대한민국의 거대 유력 정당들이 드넓은 바다일 민심과 비좁은 가두리양식장인 당심이 따로 노는 기괴한 의사결정 체계를 완벽히 정착시킨 데에는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대중과 정치의 분리 사태가 가로놓여 있다. 대중과 격리된 정치가 성행하는 한국적 풍토에서 정세균은 대중성이 부족한 정치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봉들에 두루 등정해본 인물로 평가될 수가 있겠다.
이준석은 대중과 정치의 분리 추세에 마침표를 찍고 대중과 정치가 다시금 하나로 합쳐지려는 흐름을 표상한다. 그러므로 대중과 정치가 분리되는 상황에서 승승장구해온 정세균이 금배지 한 번 달아본 적이 없는 30대 중반의 미혼자를 국회의석 100개가 넘는 제1야당의 당수로 밀어 올리려는 대중의 집단적 열망과 염원을 이해하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노릇이리라. 정세균의 장유유서 발언이 단순한 메시지 오류, 즉 말실수가 아니라 신세계에 관한 구세계의 무지를 반영하는 하나의 상징적 분수령으로 자리매김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유력 정치인 정세균
필자는 유명하지도 않으면서 유력 정치인으로 약진한 정세균의 한계를 정세균 개인 차원의 문제로만 국한시키고 싶지는 않다. 정세균의 잘못이 있다면 그가 기존의 문법과 생태계에 너무나 모범적으로 잘 적응해온 데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비토하고 이재명 현 경기도지사에 회의적인 인물들이 제 딴에는 전가의 보도랍시고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논리가 있다. 두 사람 전부 소위 ‘여의도 정치 경험’이 전무하다는 지적이다. 그에 대한 필자의 반론은 매우 간결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여의도 정계에 몸담은 인사들은 위로는 당대표급의 거물 정치인으로부터 아래로는 의원회관의 새내기 비서에 이르기까지 본인들이 아주 엄청나게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짙다. 미안한 소리이지만 정치권 종사자들이 특별한 인간으로 보이던 시절은 김대중과 김영삼과 김종필이 맹활약한 3김 시대가 마지막이었다. 3김의 퇴장 이후 여의도 정치권은 정치를 발판으로 삼아 안전한 생계수단을 확보하려는 성실하고 근면하지만 동시에 유순하고 순종적인 생활인들의 무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21세기 여의도 정치권은 어떤 곳이냐? 자신이 취업할 수 있는 유일한 억대 연봉의 직업이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 직장상사 구실을 하고, 공무원 연금수급 자격을 취득하려고 악착같이 보좌진 생활을 이어가려는 인간들이 부하직원 노릇을 맡은 곳이다. 범부 반 필부 반의 여기에서 막스 베버가 역설한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의 자질과 덕목이 감히 끼어들 틈이 어디 있겠는가?
악명 높은 5공 군사독재 시절에 전두환이 심심할 때마다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해 근엄한 표정으로 뇌까렸던 ‘안정희구 성향’이 압도적으로 팽배한 공간이 한국의 여의도 정치권이다. 여의도 바깥의 일반세계와 1밀리미터의 질적 차이도 없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게 미국에 뒤이어 심지어 중국마저 화성 표면에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착륙시키는 지금의 4차 산업혁명 세상에서 무슨 경쟁력이, 변별력이, 차별성이 되겠는가?
정세균의 치명적 과오는 국정농단도, 권력독점도, 부정부패도 아니다. 여의도 정치권을 꽉 채운 소시민들 특유의 소심하고 속물적인 안정희구적인 심리를 패기 넘치고 혈기방장한 도전정신과 두려움 없는 불굴의 진취적 기상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은 대목이야말로 정세균을 질기게 따라다닐 업보이자 실책이다. 그가 현실의 제도정치권에 팽만한 안정희구 심리를 오히려 부추기고 확대재생산함으로 말미암아 정당들, 특히 민주당 계열의 정당들은 당료로 불리는 관료의 천국으로, 당직자로 호명되는 사실상의 공무원들의 무릉도원으로 변질되었다.
모험심과 야심이 균형 있게 조화를 이뤄야만 신속하고 광범위한 변화와 혁신이 성취된다. 모험심이 결핍된 야심은 혁신과 변화 대신에 철밥통과 기득권을 낳는다. 모험심은 없고 야심만 가득한 기득권 철밥통들이 한국의 정치권을 점령한 결과 여의도는 “지금 이대로”가 당헌당규의 백미로, 정강정책의 골간으로 턱하니 들어앉은 배부른 꼰대들의 기름진 서식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준석에 대한 정세균의 냉담과 몰이해는 청년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냉담과 몰이해이다. 도약과 파격에 대한 관료들의 냉담과 몰이해이다. 창조적 파괴에 대한 구질서의 냉담과 몰이해이다. 혁신과 혁명에 대한 기득권 구체제(앙시앵레짐)의 냉담과 몰이해이다. 대중의 현상타파 욕망에 대한 현상유지론들과 복고주의자들의 냉담과 몰이해이다. 궁극적으로는 치열한 야생의 세계에 대한 온실 속 화초들의 냉담과 몰이해이다.
물론 모든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필자는 여의도에서 나랏돈으로 단 한 달도 월급을 타보지 않은, 헝그리 정신으로 완전무장한 창의적 참모들로 대통령 선거 캠프의 진용을 재정비한다면 정세균 전 국무총리에게도 여전히 얼마든지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과감하고 근본적인 자기부정이 없다면 정세균이 내년 초봄에 치러질 예정인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성명과 얼굴사진이 들어간 벽보를 붙일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