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이후 한국의 제도권 선거정치는 영남과 호남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다가 최후의 순간에는 충청도가 이기는 싸움의 양상을 띠어왔다. 충청도 민심이 편을 들어주는 정당이 대선이든, 총선이든, 지방선거이든 승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충청도는 늘 최대 승부처로 떠올랐고, 민주당 계열 정당은 김대중과 김종필의 DJP 연합과 행정수도 이전 등의 과감한 승부수를 던지며 충청도 표심을 적시에 효과적으로 공략하곤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으로 군림한 비결은 민주당으로 쏠린 민심을 보수 계통 정당으로 그가 다시 끌어온 공로에 있었다. 박근혜의 마법에는 박근혜의 모친 육영수 여사가 충청도 출신이라는 사실이 적잖이 작용했다. 충청인들의 마음속에서 박근혜는 박정희의 혈육이기 이전에 육영수의 딸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기 도중 탄핵당한 사태로 충청도는 무주공산이 되었고, 이 덕분에 더불어민주당은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에서 이곳에 무혈입성하다시피 했다.
적잖은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충청도 표는 충청도에만 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실제로는 충청도 표는 충청도 이외 지방, 특히 수도권에 더욱 많다. 고향을 떠나와 외지에서 더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충청은 호남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 모두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강남권을 제외한 수도권 거의 전 지역을 싹쓸이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박근혜 탄핵을 계기로 보수 정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중도 성향의 충청도 태생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대거 표를 몰아준 사건에 있었다.
구체적 결과물이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의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이 서울 서남권과 경기도 서남부를 완전히 석권한 일이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한강 남쪽 서울시의 이수교 서쪽에서 단 한 개의 지역구 의석도 확보하지 못하는 처참한 성적표를 거뒀다. 미래통합당은 경기 서남부 지역과 인천광역시에서도 몰살에 가깝게 역대급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서울 서남부와 경기도 서남권은 충청도 태생 주민들이 허다하게 거주하는 동네이다. 더군다나 서해안과 인접한 경기도 내의 위성도시들에서 충청도에 연고가 있는 유권자의 숫자가 토박이 유권자는 물론이고 호남 출신 유권자를 수적으로 압도한다.
박근혜 탄핵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충청도 출신 유권자들에게 박근혜 정권의 2인자인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언죽번죽 개념 없이 당대표로 옹립한 미래통합당은 도저히 표를 주려야 줄 수 없는 한심하고 비루한 정당이었다. 황교안은 허구한 날 태극기 부대를 기웃거리고, 극우 유튜브 방송에 수시로 얼굴을 내밀었다. 황교안의 시대착오적 노선과 지질한 행보 덕택에 김남국 의원처럼 자질과 품격이 의심스러운 민주당 정치인들마저 순전히 요행수 반, 운발 반으로 금배지를 달고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필자는 올해 5월 9일 실시된 제20대 대통령 선거 때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충청도에서 예상보다 저조한 득표를 올린 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0.73퍼센트로 가까스로 승리한 결정적 원인이었음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국민의힘이 여태껏 민주당의 아성으로 통해온 세종시까지 포함해 충청권의 광역자치단체장 전부를 독식하자 그 여파가 수도권 지역에 곧바로 고스란히 반영됐다. 지난 총선에서 이수교 서쪽에서 한 명의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던 국민의힘이 동작구와 영등포구와 구로구와 양천구와 강서구의 구청장 선거를 전부 승리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국민의힘은 인천에서는 10개의 기초자치단체들 가운데 무려 7개를 거머쥐는 대약진을 이룩했다. 경기도에서는 민주당의 철옹성으로 여겨지는 군포와 의왕과 안산 세 지역의 시장을 당선시키며 더불어민주당의 텃밭이었던 경기도 서남부에 금쪽같은 교두보를 확고하게 구축했다. 서울과 경기와 인천의 충청도 출향민들이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국민의힘으로 집단적으로 갈아탄 후과가 무섭게 발현된 셈이다.
이재명은 김동연을 위한 킹메이커를 자임하라
민주당은 지난 20년 동안 ‘닥치고 영남 후보론’으로 톡톡히 재미를 봐왔다. 그런데 민주당이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온 영남후보 카드가 마침내 근본적 한계에 봉착했다.
첫 번째 이유로 민주당이 야심차게 등판시킨 영남 후보를 부산경남과 대구경북을 막론하고 정작 영남권에서는 싸늘히 외면하고 있다. 영남 유권자들이 민주당의 영남 후보를 ‘영남의 옷을 입은 호남 후보’로 판단하는 탓이다.
두 번째 이유로 충청도 유권자들은 영남에 대한 공포감이 전무하다. 호남 유권자들이 당내 경선 때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영남후보의 손을 들어준 건 고립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의 산물이었다. 반면, 충청도 유권자들은 고립의 공포감으로부터 원천적으로 자유롭다. 김어준과 유시민 부류의 영남 패권주의자들이 집요하게 떠들어온 “영남 후보를 찍어주지 않으면 당신들은 전국적으로 왕따가 된다”는 투의 공갈협박이 충청도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음은 물론이다.
무적의 필승 카드처럼 오랫동안 기승을 부려온 영남 후보론이 폐기 단계를 지나 궁극적 종말 국면을 맞이한 현재, 민주당은 ‘충청 대망론’을 그 유력한 대안으로 진지하면서도 전향적으로 고민ㆍ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충청 후보에게 농축적으로 내장된 폭발적 가능성과 잠재력은 금번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개표 막판 김은혜 전 의원에게 짜릿한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낸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의 사례가 생생하게 증명해주었다.
더불어민주당은 경기도의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전에서 ‘9 : 22’라는 더블 스코어 차이로 크게 밀렸다. 그럼에도 도지사 선거를 승리했다. 야구 시합에 비견하자면, 9안타를 친 팀이 22안타를 기록한 팀에게 이긴 경기였다. 왜냐? 더불어민주당의 9안타에는 만루 홈런 같은 짜릿한 장타 한 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8회 전국 동시지방선거에서는 유권자들이 광역자치단체장 후보와 기초자치단체장 후보를 선택하면서 공천 받은 정당이 다른 후보자를 찍는 교차투표가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서울에서는 민주당 소속 현직 구청장들이 수혜자였다. 경기도에서는 경기 서남부 지역에 다수 분포하는 충청도 유권자들의 표심을 견인해낸 김동연이 그 주인공이었다. 김동연은 부친의 출신지가 충청도인 윤석열 대통령과 비교하면 충청권 유권자들에게 “우리 고향 사람”이라는 느낌을 훨씬 더 짙고 선명하게 물씬 선사해줬다.
더불어민주당은 영남에서 삼당합당 시절의 수준으로 당세가 추락했다. 호남의 전폭적이고 무조건적 지지에 기대어 근근이 연명해야만 하는 옹색한 지경으로 비참하게 내몰렸다. 이러한 정치적 지형과 구도에서 김동연 카드는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충청도 유권자들을 민주당으로 돌려세우는 비장의 무기로 충분히 자리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당연히 따른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당선인이 거대 야당의 부동의 대선주자 자격으로 무대에 올라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2인자라고 하면 지긋지긋하다. 신물이 나고 치가 떨린다.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는 만년 2인자 지위에 안주하며 개인으로서는 장기간에 걸쳐 끈질기게 정치생명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평범한 충청도 유권자들에게 그의 패배주의적 태도와 기회주의적 처세술은 그야말로 모욕감을 주었다.
더불어민주당이 만에 하나 김동연을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한 영남 후보 카드를 띄우는 불쏘시개 용도로만 활용할 심산이라면 다음번 대선에서는 폭망한 이번 지방선거가 도리어 진짜 ‘졌잘싸’로 기억될 만큼의 참혹한 패배를 당할 게 분명하다. 영남패권주의의 원조인 국민의힘은 비영남 대선주자로 정권탈환의 염원을 기어이 성취했다. 민주당이 영남후보론에 타성적으로 집착하며 애면글면한다면 재집권의 가능성은 외려 가일층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이제 공은 이재명 의원에게 넘어갔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이재명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대통령에 선출되어 그가 작금에 직면한 총체적 난국과 위기요소들로부터 조기에 무사히 탈출하기를 꿈꿀 것이다.
그렇지만 충청도 민심이 민주당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저쪽 정당’으로 계속 인식하는 상황과 여건에서는 그는 대선에 출마해봤자 백전백패일 따름이다. 이재명 의원에게 당장은 목표가 멀게만 보여도 인내심을 갖고서 우회해 접근하는 창조적 파괴의 전략적 지혜와 담대한 용기가 절실하고 갈급하게 요구되는 연유이자 배경이다.
이재명은 1964년생이다. 대선주자로는 아직 젊디젊다. 그가 선수로서 대권으로 직행하는 길 대신에 다음 대선에서는 킹메이커 역할에만 주력ㆍ전념할 방침임을 전격적으로 진정성 있게 선언한다면 이재명을 겨냥한 당내 친문세력의 비토와 당 밖 일반 여론의 불신감은 대폭 경감될 전망이다. 김동연이 집권한 5년간 이재명은 정권의 최대 주주 지위를 만끽하면서 국가경제와 외교안보 분야 등 그에게 내공과 경험이 부족한 영역들을 체계적으로 보완하고 준비할 시간과 기회를 넉넉히 가질 수가 있다.
“이재명은 합니다!” 이재명 의원의 대통령 선거운동 핵심 구호였다. ‘직업이 비대위원장인 사람’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김종인을 벤치마킹해 이재명도 일단은 킹메이커로 유연하게 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이재명은 합니다, 킹메이커로서 조연 역할을! 직업에도 귀천이 없듯이, 정치적 임무에도 존비(尊卑)가 없음을 이재명 의원이 선당후사의 대승적 차원에서 깨달아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