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유서 대필 사건`의 피해자 강기훈(58)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파기했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30일 강씨와 가족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 중 원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피고 대한민국에 대한 일부 원고들의 패소 부분 중 수사과정의 개별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부분은 위헌결정에 따라 효력이 없게 된 장기소멸시효에 관한 규정을 적용한 잘못이 있다”며 선고 배경을 설명했다.
1991년 5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서강대 옥상에서 몸을 던져 숨졌다. 김씨의 친구였던 강씨는 검찰 수사로 유서를 대필한 혐의(자살방조 등)로 기소돼 징역 3년과 자격정지 1년 6개월 형을 확정받았다.
당시 검찰은 강씨를 김씨 사망의 배후로 지목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도 김씨 유서와 강씨 진술서의 필적이 같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다. 그러나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유서의 필체가 강씨가 아닌 김씨의 것으로 보인다고 결정했다.
이에 대법원은 1991년 국과수 감정인이 혼자 유서를 감정해놓고도 4명의 감정인이 공동 심의했다고 위증한 점 등을 들어 2012년 재심을 개시해 2015년 강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그러자 2015년 11월 강씨는 국가와 당시 수사 책임자들(강신욱 서울지검 강력부 부장검사, 신상규 수석검사, 김형영 국과수 감정인)을 상대로 총 3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다만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 2명은 필적 감정 조작 과정에 개입했다고 보기 어렵고, 강압 수사 부분은 시효가 만료돼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봤다. 국과수 감정인 김씨는 1심에서 배상 책임을 부과받았으나 2심에서는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책임을 면했다.
한편 이날 대법원 판결에 대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손해배상 소송 대리인단은 입장문을 내고 "이 사건의 핵심적 부분인 수사전반과 기소에 대한 불법행위책임과 가해자 개인들에 대한 배상책임을 부정한 원심 부분은 그대로 유지했다"면서 유감을 표했다.
이 소송의 핵심은 "검찰을 비롯한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온갖 불법적 방법을 동원하여 한 젊은이를 유서대필범으로 만든 것에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으나, "대법원은 끝내 수사전반과 기소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조작사건이라는 이 사건의 본질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대리인단은 앞으로 재개될 파기환송심을 통해 "수사과정에서 벌어진 불법을 다시 확인하고 밝혀나갈 것이며 사법절차가 채우지 못한 진실이 묻히지 않도록 제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