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들이 현정화라면 현정화인 거다
「넘버 3」는 김영삼 정권 말기에 극장가에서 개봉된 우리나라 영화다. 한석규와 최민식이 조직폭력배의 중간 보스와 조폭 잡는 특수부 검사 역할을 각각 연기한 이 영화는 권력의 비정한 생리를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희극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치풍자극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권과 문재인 정권에서 단연 각광을 받은 사자성어는 ‘지록위마’이다. 내로라하는 정권 실세들이 전면에 나서서 흰 것을 검은 것이라 우기고, 검을 것을 흰 것이라고 강변하는 볼썽사나운 풍경이 일상적으로 연출됐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지록위마의 압권은 더불어민주당의 어느 철면피하고 철딱서니 없는 586 세대 국회의원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아들을 안중근 의사에 필적하는 우국지사로 추켜세운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넘버 3」는 엄청난 통찰력(Insight)을 내장한 괴력의 작품이었다. 부하들을 마구 두들겨 패면서까지 임춘애를 현정화로 기어이 만들고 마는 불사파 두목 송강호의 우악스러운 엽기성은 그로부터 20여년 후에 장차관으로, 국회의원으로, 청와대 비서진으로 크게 출세해 펼쳐질 전대협 간부들의 타락한 미래상을 놀라울 만큼 정확히 예견했다. 운동권 출신 586들의 무지막지한 조폭적 세계관에서는 조직의 명령을 거역하고 임춘애를 임춘애라고 진실에 부합하게 호명하면 의리 없는 배신자 취급을 당하기 마련이다. 금태섭도, 조응천도, 박용진도, 논객 진중권과 기생충 전문가 서민도 그렇게 차례차례 배신자로 매도되어갔다.
「넘버 3」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은 에피소드가 있다. 마동석(최민식)이 서태주를 ‘넘버 3’로 분류하자 태주(한석규)가 자신은 ‘넘버 2’라고 거세게 반발하며 결국에는 서로 계급장 떼고 야밤의 아파트 놀이터에서 시쳇말로 다이다이를 뜨는 장면이다.
태주는 동석의 이죽거림에 왜 폭발했을까? 마동석은 남자 대 남자로 맞장을 뜨는 개싸움을 허락하면서까지 어째서 서태주에게 은근하게 사과를 했을까? 필자는 그 이유는 동석이 태주의 너무나 아픈 곳을 찌른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세계에서는 넘버 1을 빼면 “다 평등한 넘버 3”일 뿐이다. 한마디로, 보스를 제외하면 나머지 조직원 전부는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초라한 잉여인간일 따름인 깍두기에 불과하다.
무법지대인 건달의 세계에서도,합법적이고 제도화된 여의도 정치권에서도1인자 빼면 다2인자이다.쉽게 표현하면,그 어느 정권에서건 대통령을 제외한 다른 구성원들은 본질적으로 깃털에 지나지 않는다.이 자명한 이치를 가장 잘 간파한 사람이 영원한2인자로 통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였다.
정세균을 호출하면 어떨까
저 세상 사람을 호출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므로 아직은 살아 있는 인간들의 무리로 눈길을 돌려보자.남한의 현역 정치인을 통틀어 권력의 속성을 제일 명민하게 이해하는 인물은 누구일까?정답을 맞히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주인공은 다름 아닌 정세균 현 국무총리이다.
한 인간이 무탈하게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영위하려면 권력과 권위의 차이점과 함수관계를 오차 없이 파악해야만 한다.권력과 권위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개인의 파멸은 물론이고 집단의 종말마저 임박한 탓이다.
권위는 있어도 권력이 허약해 실패하는 사례는 당연히 있다. 피노체트의 군부쿠데타에 전복된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이러한 범주에 전형적으로 해당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1991년 8월의 소련 공산당이나, 한국의 박근혜 정권처럼 권위가 무너지면서 그 후과로 말미암아 권력도 도미노 쓰러지듯이 엎어지는 법이다.
문재인 정권의 극성 지지자들은 요즘 엄청난 당혹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행정권력과 사법권력과 방송권력에 뒤이어 원내에서 180석의 압도적 다수 의석을 석권하며 의회권력까지 강력하게 장악하는 권력의 그랜드슬램을 마침내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영이 전혀 서지 않는 사회 전반의 총체적 레임덕 분위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조금만 찬찬히 따져보면 별로 당황할 이변이 아니다. 문재인 정권의 권위가 조국 사태를 거치며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까닭에서이다. 지금 문재인 정권의 고정 지지층 이외의 국민들은 정권이 무슨 일을 시작할 때마다 “해먹기 위해서 저런다”는 인식의 틀 안에서 문재인 정권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다. 태양광 발전도 자기들끼리 해먹기 위해서, 검찰 개혁도 자기들끼리 해먹기 위해서, 그린벨트 해제도 자기들끼리 해먹기 위해서, 심지어 공공의대 도입도 부유한 586 세대의 아들딸들이 음서제로 의사 노릇 해먹기 위해서 꾀하는 불순한 동기의 이기적 소행이라고 국민들은 확신하는 것이다.
정치학개론에서 권위는 없으면서 권력만 있는 정권을 ‘권위주의 정권’으로 규정한다. 권위는 국민의 상식과 서민적 감수성에 기초해 정부정책이 결정되고 집권세력의 삶이 규율될 때 획득되는 정치적 자산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어떤 짓을 해도 무조건 용서되는 초엘리트이고, 추미애 장관의 아들은 안중근 의사와 동급의 위인이며, 김홍걸 의원과 윤미향 의원은 시정잡배 수준으로 게걸스럽게 재물을 탐해온 것으로 여겨지는, 특권과 반칙에 찌들 때로 찌든 부도덕한 정권의 내부에는 정당한 권위의 기반이자 원천인 국민의 상식과 서민적 감수성이 존재하려야 도무지 존재할 수가 없다.
권력은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청와대의 눈치를 열심히 살피는 근본적 원인은 그들이 권력은 2인자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진리를 여전히 깨닫지 못한 채 허망하고 무의미한 넘버 2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소모적 경쟁을 벌이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그간 힘들게 쌓아올린 자기의 소중한 권위를 스스로 훼손하는 자충수를 수시로 남발하는 중이다.
김부겸 전 행정자치부 장관은 권력 없는 사람이 권위마저 상실할 경우에 어디까지 추레해질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얼마 전 치러진 집권여당의 전당대회에서 명목상의 2등을 기록했다. 허나 내용상으로는 박주민에게조차 뒤지는 사실상의 꼴찌였다.
상전벽해한 정세균의 재평가가 시급하다
필자는 정세균 총리를 겨냥해 퍼부은 독설의 양과 질의 기준으로 견적을 내보자면 대한민국에서 명실상부한 넘버 1에 오를 수 있는 입장이다. 그런 필자가 근래에 비록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나마 정세균에 대한 재평가에 인색하지 않게 되었다. 넘버 2를 노리는 맹목적 충성경쟁이 경쟁자 모두의 공멸로 귀결됨을, 권력에는 한도가 있지만 권위는 당사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무한히 재충전될 수 있음을 여권의 주요 정치인들 중에서 현재로서는 오직 정세균만이 지혜롭게, 또는 영악하게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세균 총리는 추미애 파동을 비롯해 작금에 문재인 정권이 휩싸인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과 의혹들에 대해 민망하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그의 위상과 이력을 감안하면 위험수위를 돌파한 발언이었다.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이 행정부의 2인자인 국무총리로 거취를 옮기는 결정은 매우 민망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여당 인사들 가운데 유일무이하게 국민의 상식과 서민적 감수성에 기초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정세균 총리는 권력은 몰라도 권위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다.
권력만으론 지속가능한 권위를 확보할 수 없다.반면에 권위만 단단히 간수한다면‘미래권력’을 창출할 가능성을 항시 유지할 수는 있다.
다수의 정치 분석가들이 정세균 총리를 차기 대선의 다크호스로 지목해왔다. 정세균의 경력과 정세균계의 조직력에 주목한 판단이다. 그러나 화려한 간판과 탄탄난 결속력은 권력의 밀실이지, 권위의 산실은 아니다. 공인의 권위는 국민의 상식과 서민적 감수성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꾸준히 조응할 수 있느냐에 그 존폐 여부가 달려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세균은 야금야금 권위를 까먹는 이낙연-이재명 두 이씨와도, 문빠들을 지나치게 의식했다가 기존에 있던 약간의 권위마저 완전히 홀라당 날려먹은 김부겸과도 철저하게 대비되고 있다.
필자는 정치인 정세균의 무소신과 기회주의를 아주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비판해왔다. 한데 지금의 문제인 정권에서 나름의 신념과 일관성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유력 정치인이 오로지 정세균 총리 하나라고 재평가해야만 하는 기괴한 현실이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예상 못한 민망한 감정에 직면하는 인민대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대권주자로서의 정세균의 잠재적 몸값은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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